글로벌 원자재 시장에서 ‘탈중국’이 주요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특히 유럽은 지난 5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유사한 핵심원자재법(CRMA)을 내놓았는데요. 리튬, 마그네슘 등 핵심 광물의 중국산 의존에서 벗어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럽연합의 핵심원자재법, CRMA
지난 5월 23일, 유럽연합(EU)이 핵심원자재법(Critical Raw Materials Act: CRMA)을 발효했습니다. CRMA는 유럽 내 공급망을 강화하고 단일 공급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법안입니다. 이를 통해 역내 제조 역량을 늘리고 핵심 원자재 공급망의 지속 가능성과 순환성을 강화하기 위한 틀을 갖춘다는 것이 EU가 설명한 제정 배경입니다.
구체적으로는 2030년까지 제3국산 전략적 원자재 의존도를 역내 전체 소비량의 약 65% 미만으로 낮춘다는 목표를 잡고 있으며, 이를 위해 공정별로 역내 채굴 비중을 10%, 가공·처리는 40%, 재활용은 15%로 늘린다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급선 다변화를 위해 채굴 기술과 관련한 역내외 신규 사업에 대해선 허가 기간을 27개월 이내, 가공·재활용 관련 사업은 15개월 이내로 단축한다는 내용도 담았습니다. 특히 탄소중립 관련 산업에 필수적인 관리 대상 핵심 원자재는 총 34가지를 지정했으며, 이중 리튬이나 마그네슘, 희토류를 포함한 17가지는 ‘전략적 원자재’로 분류해 공급망 위험 평가를 일정 주기마다 실시하도록 한다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유럽판 IRA’ CRMA, 미국 IRA와 다른 점은?
CRMA의 핵심은 EU 외의 국가에서 해당 규정 수치 이상의 원자재를 조달하는 것을 사실상 막겠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이 CRMA가 ‘유럽판 IRA’로 불리는 이유인데요. IRA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의 약자로, 2022년 미국 바이든 정부에 의해 발효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상황 속에서 미국 내 물가상승 억제를 위해 제정된 법안입니다. 하지만, 미국 밖에서 만든 전기차나 중국·러시아 등 적대국에서 채굴·제조한 광물과 부품이 들어간 배터리를 쓴 전기차 등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외국 기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미국 IRA와 비교하면 CRMA는 역내 제품에 대한 우대 조치나 외국산 제품 및 기업에 대한 불이익 관련 조항을 담고 있지는 않은데요. 원자재 생산 과정에서 환경이나 노동 규제 등을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 있어, 이 부분이 EU 역외 기업들을 차별하는 명분이 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앞으로 구체적인 이행계획이 수립되면, 기업들의 행정적인 부담이 늘어나거나 규제 성격을 가진 제한 조처가 마련될 수 있다는 우려가 높습니다.
주요 국가의 무역 압박 강화, 그렇다면 우리는?
물론, 당장은 CRMA를 통해 우리나라의 개별 기업에까지 미칠 영향이 크지 않다는 게 지배적인 의견입니다. 강제성이 있거나 차별에 관련한 구체적인 조항이 없고, EU 차원에서 달성하려는 목표치를 제시하는 수준이다 보니 그 효과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더구나 CRMA에서 제시한 방향대로 제3국산 원자재 의존도를 낮추려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드는 만큼 실현 가능성 여부를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그러나 유럽을 비롯해 미국 등 주요 국가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애쓰고 있는 흐름이 뚜렷한 건 사실입니다. 최근 미국 무역대표부(United States Trade Representative: USTR)가 중국산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대한 관세를 25%로 올린 것에 이어 중국산 전기차, 반도체, 배터리, 태양광 패널, 또 의료품 약 180억 달러에 대한 관세를 대폭 인상한 것도 이러한 흐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전기차에 대한 관세가 현행 25%에서 100%로, 리튬이온 전기차 배터리와 배터리 부품은 7.5%에서 25%로, 반도체와 태양광 전지도 50%까지 상향될 예정입니다. 재닛 옐런 미국 재무 장관도 중국의 값싼 수출품들이 제조업체들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므로 G7 국가들이 연합해 중국의 저가 상품에 대응하는 강한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과 유럽의 움직임에 따라 칠레, 브라질,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들도 중국산 철강 제품에 대한 관세를 올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남미의 최대 원자재 구매국이자 주요 투자국인데, 이 같은 강행을 결정했다는 것이 이례적입니다. 가장 먼저 칠레가 중국산 철강 제품에 대해 최대 33.5%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고, 브라질 역시 수입 합금에 대해 관세율 할당제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콜롬비아의 철강업체 파스 델 리오도 50% 할인된 가격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국산 철강에 대해 수입 관세를 인상하고 자국 업체들이 먼저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처럼 여러 국가들이 탈중국 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중국 원자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역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입니다. 특히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국내 완성차 업계와 배터리 업계는 중국과 글로벌 무역 현황을 지속적으로 모니터하면서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민관 차원의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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